유지태를 떠올리면 먼저 생각나는 건 자주 흥분하지 않는 낮은 목소리, 느릿하지만 단단한 말투, 그리고 화면을 차분하게 장악하는 눈빛이다. 초기에는 청춘 멜로 영화에서 담백한 대학생을 연기했고, 이후에는 올드보이 같은 강렬한 스릴러, 스플릿 같은 스포츠 드라마, 범죄 오락 영화 꾼, 금융 스릴러 돈까지 장르를 넓혀 왔다. 지금 돌이켜 보면, “잘생긴 배우”라는 말보다는 “무게를 책임지는 배우”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필모그래피다.
요청해 준 작품들 가운데 동감, 올드보이, 스플릿, 꾼, 돈은 실제로 유지태의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는 작품들이다. 아래에서는 이 다섯 편을 중심으로, 배우 유지태가 어떤 얼굴들을 보여줬는지 차례대로 살펴본다.

1. <동감> – 서로 다른 시간을 잇는, 조용한 청춘의 얼굴
영화 동감은 다른 시대를 사는 두 대학생이 무전기를 통해 우연히 연결된다는 설정의 청춘 멜로 영화다. 한 명은 과거에, 다른 한 명은 현재에 살고 있지만, 서로의 존재를 믿게 되면서 조금씩 일상과 마음이 바뀌어 가는 이야기다. 유지태는 이 작품에서 담백한 남학생 주인공을 맡아, 과장되지 않은 눈빛과 말투로 ‘그 시절 대학생’의 공기를 고스란히 옮겨왔다.
동감 속 그의 연기는 지금 관점에서 봐도 굉장히 절제되어 있다. 지금처럼 감정선을 세게 밀어붙이는 멜로가 아니라, 잠깐 머뭇거리는 호흡, 대사를 고르는 침묵, 혼자 무전기 앞에서 웃다가도 이내 진지해지는 표정이 중심이다. 그래서 관객은 이 인물을 “너무 멋진 남자”라기보다, 그냥 대학 캠퍼스 어딘가에 실제로 있었을 것 같은 선배로 느끼게 된다.
동감은 결과적으로 유지태에게 “멜로도 되는 배우”라는 이미지를 안겨준 작품이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 영화에서 이미 그의 장점이 다 드러나 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되고, 크게 웃거나 울지 않아도 되는 인물일수록, 오히려 더 존재감이 선명해지는 타입이라는 것. 이건 이후 필모에서도 계속 이어지는 특징이다.
2. <올드보이> – 복수극의 정점에 서 있던 상대역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유지태를 ‘한국 영화사에 남는 얼굴’로 만들어 준 작품이다. 오랜 세월 감금되어 있던 남자가 갑자기 풀려나고, 누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추적해 가는 복수극의 한가운데서, 유지태는 그 모든 비밀을 쥐고 있는 상대역을 맡았다.
올드보이에서 그가 보여주는 건, 소리를 질러 상대를 압도하는 악역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표정의 온도를 거의 바꾸지 않는 사람이다. 입가에 걸린 옅은 미소, 감정을 숨긴 눈빛, 마치 이미 모든 판을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가 반복되면서 관객은 이 인물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직감하게 된다.
특히 진실이 드러나는 후반부, 그가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장면에서 유지태의 연기는 한 번 더 무거워진다. 자신이 왜 이런 복수를 설계했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잃었는지 이야기하는 순간에도, 그는 끝까지 큰 감정 폭발을 선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히 이야기할수록, 관객에게 남는 찜찜함과 충격은 더 커진다. 올드보이는 이 역할 하나만으로도 유지태의 필모 안에서 압도적인 지분을 차지하는 작품이다.
3. <스플릿> – 볼링장에서 다시 굴러가기 시작한 인생
스플릿은 볼링을 소재로 한 드라마로, 과거에 촉망받던 볼링 선수가 어느 사건 이후 몰락했다가, 특별한 재능을 지닌 청년을 만나 다시 한 번 승부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이야기다. 유지태는 여기서 한때 잘 나가던 전 프로 선수를 연기한다. 볼링장 한편에서 지친 얼굴로 시간을 때우며 살던 사람이, 다시 한번 “한 판 붙어볼까” 하는 마음을 먹게 되는 지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스플릿 속 그의 연기는 이전의 차가운 이미지와는 조금 다르다. 몸은 크고 눈빛은 여전히 묵직하지만, 어깨가 살짝 구부정하고, 표정에는 피로와 자조가 섞여 있다. 볼링을 칠 때만 잠깐 집중력이 살아나고, 공이 레인을 굴러가는 동안에만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는 사람처럼 보인다.
청년과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유지태는 무뚝뚝하지만 마음이 없는 건 아닌 어른의 얼굴을 보여준다. 잔소리를 하면서도 결국 뒤를 봐 주고, 승부가 걸린 순간에는 누구보다 진지해지는 타입. 이 작품을 통해 관객은, 그가 단순히 차갑고 매끄러운 역할만 하는 배우가 아니라, 구겨진 삶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도 충분히 설득력 있게 해낼 수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4. <꾼> – 사기꾼을 쫓는 사람, 혹은 또 다른 꾼
꾼은 사기꾼들만 골라 속이는 사기꾼과, 그를 이용해 더 큰 대상을 노리는 사람들 이야기를 다룬 범죄 오락 영화다. 이 세계에는 경찰과 사기꾼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겉으로는 정의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속으로는 자기 이익을 챙길 궁리부터 하는 인물들이 뒤섞여 있다.
유지태는 이 영화에서 판을 굴리는 쪽에 가까운 인물로 등장한다. 수사기관의 옷을 입고 있지만, 사기꾼들과 부딪히면서도 끝까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정확히 어느 편에 서 있는지, 지금 이 선택이 진심인지 계산인지, 관객이 끝까지 판단하기 어렵게 만드는 캐릭터다.
그는 꾼에서도 특유의 말투와 표정으로 인물의 이중성을 표현한다. 겉으로는 합리적인 계획을 설명하면서도, 눈빛은 항상 한 발짝 옆을 보고 있는 느낌. 누구보다 상황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지막 순간에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판을 틀어 버릴 것 같은 인물이다. 그래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관객은 이 캐릭터에 대해 완전히 확신을 갖지 못한다. 이 모호함이 바로 꾼 속 유지태가 남기는 인상이다.
5. <돈> – 얼굴 없는 작전 세력, 목소리만으로 남는 존재감
돈은 증권가를 배경으로 한 금융 스릴러다. 막 증권사에 입사한 신입 주식 브로커가, 정체 모를 ‘작전 세력’과 얽히면서 점점 더 위험한 거래에 발을 들이는 이야기다. 유지태는 이 영화에서 시장 뒤에서 돈의 흐름을 조종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전화기와 지시 몇 마디만으로 수백억 단위의 돈을 움직이는 사람이다.
이 캐릭터는 이름보다는 별명과 분위기로 기억되는 쪽에 가깝다. 그의 얼굴이 화면에 등장하는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수 있지만, 한 번 등장할 때마다 남기는 인상은 매우 강하다. 유지태는 목소리 톤과 시선만으로, “실제 금융시장 어딘가에도 있을 것 같은 작전 세력”의 느낌을 만들어 낸다. 크게 화를 내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지만, 그가 풍기는 압박감은 후배 브로커를 완전히 압도한다.
돈에서 인상적인 건, 그가 연기한 인물이 단순한 악당이라기보다, 이 구조에 완전히 적응해 버린 사람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누구나 대체 가능한 부품 정도로 사람을 취급하고, 그러면서도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얼굴. 유지태는 이 인물을 통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냉혹한 시스템의 얼굴을 연기해 낸다.
6. 유지태라는 배우가 남긴 공기
동감의 청춘, 올드보이의 비밀을 쥔 남자, 스플릿의 전 볼링 선수, 꾼의 회색 지대에 선 인물, 돈의 얼굴 없는 작전 세력까지. 이 작품들을 나란히 떠올려 보면, 유지태는 한 가지 틀에 묶인 배우가 아니다. 멜로, 스릴러, 스포츠 드라마, 범죄 오락물, 금융 스릴러에 이르기까지, 장르가 바뀔 때마다 조금 다른 결의 인물을 꺼내 보였다.
그의 연기의 공통점은 절제와 여백이다. 캐릭터가 분노할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감정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기보다 끝에서 한 걸음 정도를 남겨 둔다. 관객은 그 한 걸음의 여백 안에서, 이 인물이 실제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상상하게 된다. 그래서 유지태가 등장하는 장면은 대사가 많지 않아도 묵직하게 느껴진다.
또 하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잘 어울리는 역할이 많아지는 배우라는 점이다. 동감처럼 젊은 시절의 순수한 얼굴에서 시작해, 올드보이·돈 같은 작품의 복잡한 인물들까지. 그가 나이를 먹고, 필모그래피가 쌓일수록 조금 더 무겁고 입체적인 캐릭터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유지태가 어떤 작품과 인물을 선택할지 아직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동감·올드보이·스플릿·꾼·돈을 떠올려 보면,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가 맡는 캐릭터는 대부분,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도 이름과 얼굴, 말투까지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것. 그게 바로 배우 유지태가 지금까지 한국 영화 속에서 만들어 온 공기이자, 그를 계속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