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은 이제 “연기를 잘한다”는 말로는 부족한 배우다. 한국 상업영화의 흐름을 짚어볼 때, 특정 시기를 상징하는 얼굴을 꼽으라면 그 가운데 항상 이병헌의 이름이 등장한다. 멜로, 액션, 스릴러, 정치극, 사극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중심을 맡아온 배우이고, 실제로도 그가 합류했다는 사실만으로 영화에 대한 신뢰도가 달라진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그중에서도 〈광해, 왕이 된 남자〉, 〈내부자들〉, 〈마스터〉, 〈백두산〉, 〈남산의 부장들〉은 이병헌이 가진 얼굴들을 가장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대표작들이다. 이 다섯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한 배우가 어떤 방식으로 캐릭터를 쌓고, 또 한국 관객에게 어떤 믿음을 주게 되었는지 자연스럽게 보인다.

1. 〈광해, 왕이 된 남자〉 – 한 사람이 두 사람을 연기할 때
2012년 개봉한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이병헌은 한 영화 안에서 두 인물을 동시에 연기했다. 실제 왕인 광해군과, 그와 놀랍도록 닮은 천민 하선. 설정만 보면 흔한 ‘분장극’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영화가 특별해진 이유는 이병헌이 두 사람을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설득력 있게 분리해낸 점에 있다.
광해는 의심이 깊고 예민하며, 왕이라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경계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같은 얼굴이지만, 하선은 완전히 다르다. 말투, 걸음걸이, 눈빛이 모두 다르고, 권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날그날을 살아가던 사람이다. 이병헌은 같은 얼굴로 두 사람을 연기하면서도, 관객이 한 번도 헷갈리지 않게 만든다.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 지금이 광해인지 하선인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을 정도다.
영화 후반부, 하선이 진짜 왕처럼 나라와 백성을 고민하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이병헌의 연기는 한 번 더 무게를 얻는다. 처음에는 가짜 왕 역할을 어찌어찌 수행하던 인물이, 점점 스스로 책임을 떠안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과정. 이 변화가 과장된 감정이 아니라, 작은 표정의 변화와 눈빛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이병헌 특유의 힘이 드러난다. 〈광해〉는 “이병헌이 아니면 성립되지 않는 영화”라는 말을 듣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2. 〈내부자들〉 – 안상구, 정치와 폭력의 한가운데 서 있는 인물
2015년 영화 〈내부자들〉에서 이병헌은 정치권과 재계를 잇는 해결사이자, 한때 거칠게 나갔다가 버려진 인물 안상구를 연기했다. 이 캐릭터는 깡패, 정치 브로커, 피해자, 복수자라는 여러 얼굴이 겹쳐 있는 사람이다. 한 줄로 정리할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에, 배우 입장에서도 쉽지 않은 역할이다.
이병헌은 안상구를 “못난 인간”과 “놓치기 아까운 인간” 사이 어딘가에 세워둔다. 말투와 행동은 거칠고, 세련된 맛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의 대사와 표정 속에는 특유의 뼈 있는 농담과 자존심이 숨어 있다. 특히 손을 잃고 나서, 다시 판을 뒤집기 위해 버티는 안상구의 모습은 단순한 복수를 넘어서 한 시대에 대한 저항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부자들〉은 정치·언론·재계 카르텔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영화지만, 관객이 끝까지 따라가게 되는 이유는 결국 안상구라는 인물이 가진 생동감 때문이다. 이병헌은 이 인물을 너무 멋있게 만들지도, 그렇다고 비참하게만 소비하지도 않는다. 망가지면서도 통쾌하고, 웃기면서도 씁쓸한 감정을 동시에 남기는 캐릭터를 만들어냈고, 이 작품을 계기로 “이병헌의 연기 폭은 여기까지도 갈 수 있다”는 인식이 더 넓어졌다.
3. 〈마스터〉 – ‘추적하는 사람’으로 돌아온 이병헌
2016년 영화 〈마스터〉에서 이병헌은 희대의 금융사기 사건을 일으킨 회사 대표 진회장 역을 맡았다. (※ 실제 영화에서 이병헌은 대형 다단계 금융사기를 일으킨 기업의 수장으로 등장하며, 사건의 핵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이 작품은 거대한 금융 범죄를 둘러싼 수사극 형식을 취하고 있고, 범죄를 저지르는 쪽과 추적하는 쪽의 두 축이 명확히 나뉘어 있다.
〈마스터〉 속 이병헌의 연기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위기 앞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사람”이다. 진회장은 사기꾼이지만, 단순히 허풍만 떠는 인물이 아니다. 투자자들을 설득할 때의 화려한 말솜씨, 위기가 닥쳤을 때 상황을 뒤집으려 하는 태도 모두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이다. 이병헌은 이 캐릭터를 단순 악인이 아니라, 시대의 허점을 파고드는 인물로 표현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캐릭터 역시 〈내부자들〉의 안상구와는 전혀 다른 결의 “질 나쁜 사람”이라는 것이다. 안상구가 밑바닥에서 기어오르다 버려진 인물이라면, 진회장은 처음부터 정장을 입고 시스템 안에서 사람들을 흔드는 쪽에 가깝다. 두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보면, 이병헌이 “나쁜 역할”까지도 서로 다른 밀도로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분명하게 보인다.
4. 〈백두산〉 – 재난 한복판에서 균형을 잡는 리준평
2019년 개봉한 〈백두산〉은 백두산 화산 폭발이라는 가상의 재난 상황을 그린 영화다. 이병헌은 여기서 북한 요원 리준평을 연기했다. 처음에는 의도와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로 등장하지만, 사건이 진행될수록 점점 더 중심으로 들어오는 캐릭터다.
리준평은 남한과 북한, 각기 다른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 사이에서 위험한 선택을 반복하는 인물이다. 이병헌은 이 캐릭터를 과도하게 영웅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지친 얼굴, 체념 섞인 말투, 그러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눈빛을 통해 “이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계산하면서도, 결국 사람을 버리지 못하는 인물”의 느낌을 만들어낸다.
〈백두산〉은 재난 블록버스터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중심에는 결국 몇 명의 사람이 서 있다. 그 가운데 이병헌이 연기한 리준평은, 남과 북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구도를 넘어, 눈앞의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을 반복하는 캐릭터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에도, 관객은 화산 폭발 장면만큼이나 리준평이라는 인물을 떠올리게 된다.
5. 〈남산의 부장들〉 – 김규평, 권력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무너지는 사람
2020년 개봉한 〈남산의 부장들〉은 1970년대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권력의 긴장 관계를 다룬 영화다. 이병헌은 여기서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을 연기한다.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했지만, 영화 속에서는 조금 더 추상화된 이름과 설정으로 그려진다.
김규평은 권력의 바로 옆, 혹은 가장 깊은 속을 알고 있는 인물이다. 대통령에게는 가장 가까운 측근이면서도, 동시에 그 권력을 누구보다 차갑게 분석하는 사람이다. 이병헌은 이 캐릭터를 크게 흔들리지 않는 얼굴과 낮은 톤의 목소리로 이끌어간다. 목소리를 높이는 장면이 많지 않은데도, 그의 말 한마디는 항상 장면의 중심에 가깝게 들린다.
〈남산의 부장들〉이 흥미로운 점은, 김규평이라는 인물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사람처럼 보이면서도, 관객의 시선에서 보면 조금씩 균열이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흔들리지 않는 듯 보이는 얼굴, 그러나 결정적인 선택 앞에서 드러나는 망설임과 피로감이 이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든다. 이병헌은 이 미묘한 균열을 몸짓과 시선으로 표현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6. 이병헌이라는 배우가 남긴 것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한 사람이 두 사람을 연기했던 배우, 〈내부자들〉에서 정치와 폭력의 경계에 선 인물을 연기했던 배우, 〈마스터〉에서 금융 범죄의 중심에 선 인물, 〈백두산〉에서 재난 속 선택을 강요받는 요원, 〈남산의 부장들〉에서 권력의 한가운데 놓인 부장을 연기했던 배우. 이 이름과 얼굴을 이어 보면, 결국 “이병헌은 어떤 상황에 던져 놓아도 설득력을 만들어내는 배우”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의 연기는 과장된 제스처보다 정확한 타이밍과 호흡에 가깝다. 말을 하지 않아도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 조용히 서 있어도 장면의 중심을 차지하는 사람. 그래서 관객은 이병헌이 캐스팅된 작품을 보면, 장르와 소재와 상관없이 어느 정도 이상의 완성도를 기대하게 된다. 이미 수많은 대표작이 있지만, 여전히 다음 작품이 궁금한 배우. 이병헌의 필모그래피를 정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