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균은 한마디로 “톤이 분명한 배우”다. 부드러운 저음, 특유의 말투, 단단한 눈빛 덕분에 그가 등장하는 장면은 항상 일정한 밀도로 채워져 있다. 초반에는 ‘달달한 로맨스 남자’의 이미지가 강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장르와 캐릭터의 폭을 넓혀가며, 한국 영화·드라마에서 존재감이 분명한 배우로 자리 잡았다. 그 과정에서 많은 시청자와 관객이 기억하는 대표작들이 바로 영화 <기생충>, <끝까지 간다>, <내 아내의 모든 것>, 그리고 드라마 <나의 아저씨>다.
이 네 작품만 찬찬히 따라가 봐도, 이선균이 한 가지 얼굴에 머무르지 않고 조금씩 다른 결을 가진 인물들을 만들어 왔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래에서는 각 작품 속 캐릭터와 연기를 중심으로, 배우 이선균의 필모그래피를 정리해 본다.

1. <기생충> – 부유하지만 어딘가 공허한 가장, 박사장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 이선균은 IT 기업 대표이자 부유한 집안의 가장, 박동익(박사장)을 연기했다. 반지하에 사는 ‘기택네’ 가족과 대비되는 인물로, 상대적으로 부족함 없이 살아온 계층의 얼굴을 보여주는 역할이다. 박사장은 겉으로 보기엔 예의 바르고 깔끔하며, 가정에서도 큰 소리 내지 않는 사람처럼 보인다.
이선균은 이 캐릭터를 대놓고 거만하게 연기하지 않는다. 대신 작은 디테일로 계급 차이를 드러낸다. 차 안에서 나는 냄새를 언급하는 장면, 집 안에서 무심코 내뱉는 한마디, 직원들을 대할 때의 태도에서 “선은 지키되, 그 선을 절대 넘지 않으려는 사람”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 톤이 과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관객 입장에서는 더 불편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기생충>에서 박사장은 절대적인 악인도, 특별한 선인도 아니다. 그냥 자신이 살아온 방식에 익숙한 사람이다. 이선균은 그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에도 많은 관객이 기택네 가족만큼이나 박사장 부부의 얼굴을 오래 기억하게 된다. 이 작품은 이선균이 가진 “생활 연기 + 계급감각”이 가장 세련되게 드러난 영화 중 하나로 남아 있다.
2. <끝까지 간다> – 벼랑 끝에 몰린 형사의 질주
2014년 영화 <끝까지 간다>에서 이선균은 교통사고를 계기로 연속된 사건에 휘말리는 형사, 고건수를 연기했다. 장례식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발적인 사고가 발생하고, 그 사건을 숨기려다 더 큰 사건에 얽히는 인물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이 터지는 “재수 없는 날”의 연속을, 거의 영화 내내 달리고 뛰고 구르면서 소화해야 하는 역할이었다.
고건수 캐릭터의 매력은 완벽한 히어로가 아니라는 데 있다. 실수도 하고, 당황도 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감이 있다. 이선균은 이 인물을 너무 멋있게 만들려 하지 않는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표정, 상황을 수습할 수 없게 됐을 때의 멘붕,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려는 눈빛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끝까지 간다>는 스릴러이자 블랙코미디적인 요소가 함께 있는 영화다. 그 미묘한 장르의 균형은 배우의 톤이 결정한다. 이선균은 심각한 상황에서도 어딘가 웃음이 나는 리액션을 보여주고, 반대로 웃어넘길 수 있을 것 같은 장면에서는 진지하게 몰입하게 만든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감정의 온도를 빠르게 오르내리는 ‘추격형 영화’에서도 중심을 지킬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3. <내 아내의 모든 것> – 사랑하지만 지쳐버린 남편, 그리고 현실적인 부부 이야기
2012년 로맨틱 코미디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이선균은 결혼 생활에 지친 남편 이도현 역을 맡았다. 아내 정인(임수정 분)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하루하루가 피곤하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커져 버린 인물이다. 이 영화는 ‘이혼’이라는 결과보다, 그 앞에 쌓여 있는 감정의 피로를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선균이 연기한 이도현은, 많은 관객이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남편”으로 느껴지는 캐릭터다. 처음에는 다정했지만, 결혼 생활이 길어지면서 말수가 줄고, 갈등 상황에서 대화를 시도하기보다 피하는 쪽을 택한다. 이 역할은 자칫하면 무책임하거나 답답한 사람으로만 보일 수 있는데, 이선균은 그 안에 미안함과 소심함,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애정을 함께 담아낸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은 류승룡이 연기한 카사노바 캐릭터의 임팩트도 크지만, 실제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축은 부부 사이의 감정선이다. 이선균은 과하게 망가지지 않으면서도, 이 사람의 찌질함과 인간적인 면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완벽하진 않지만, 어디에나 있을 법한 남편”이라는 현실적인 캐릭터를 완성해 냈다.
4. <나의 아저씨> – 박동훈이라는 인물이 남긴 잔상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배우 이선균의 이름을 다시 보게 만든 작품이다. 그는 여기서 중년 회사원 박동훈을 연기했다. 회사에서는 팀장으로, 집에서는 가장으로 살아가는 전형적인 ‘아저씨’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상처와 책임을 동시에 짊어지고 있는 인물이다.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은 화려한 캐릭터가 아니다. 목소리를 크게 높이지 않고, 표정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회사에서의 미묘한 권력 관계, 가족 안에서의 피로, 그리고 이지안(이지은 분)을 만나며 조금씩 변해가는 감정선이 조용한 톤 속에 차곡차곡 쌓인다. 이선균은 그 변화를 거의 목소리와 눈빛만으로 표현한다.
특히 이 드라마는 “선한 사람”을 이상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박동훈 역시 완벽하지 않고, 실망스러운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자가 끝까지 그를 응원하게 되는 이유는, 이선균의 연기 안에 담긴 진심 때문이다. 무너지고 싶지만 버텨야만 하는 사람의 어깨,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쉽게 꺼내지 못하는 사람의 숨소리가 장면 곳곳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나의 아저씨>는 이선균이 가진 저음의 울림과 묵직한 연기가 가장 깊게 박힌 작품으로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5. 네 작품으로 정리해 본 배우 이선균의 얼굴들
<기생충>의 박사장, <끝까지 간다>의 형사 고건수, <내 아내의 모든 것>의 남편 이도현, <나의 아저씨>의 박동훈까지. 이 네 작품을 쭉 놓고 보면, 이선균은 단순히 한 가지 캐릭터에 안주하는 배우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상위 1%의 부유한 가장부터, 벼랑 끝에 몰린 형사, 지친 직장인 남편, 그리고 조용히 버티며 살아가는 중년 회사원까지,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인물들을 각기 다른 결로 연기해 왔다.
그의 연기의 공통점은 “과하지 않다”는 데 있다. 자극적인 장면이나 감정 폭발 없이도, 대사 몇 줄과 표정 한두 가지로 인물의 마음을 전달한다. 그래서 이선균이 출연한 작품을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극 중 인물의 감정에 조용히 이입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소리 지르지 않아도, 울부짖지 않아도 오래 남는 얼굴. 그게 바로 배우 이선균이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남긴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