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어떤 얼굴이 떠오를까. 조용히 미소 짓던 멜로의 남자일 수도 있고, 권력 앞에서 서늘하게 웃는 정치 권력자일 수도 있고, <오징어게임> 속에서 삶에 찌든 456번 참가자 성기훈의 얼굴일 수도 있다. 데뷔 초 모델 출신으로 주목받았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참 잘생긴 배우”라는 말을 넘어서, “저 사람 나오면 이야기가 단단해진다”라는 믿음을 주는 배우가 됐다.
이 글에서는 배우 이정재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다섯 작품, <관상>, <신과함께> 시리즈에서의 출연, <오징어게임>, <암살>, <도둑들>을 중심으로 그가 어떤 캐릭터들을 통해 자신의 색을 넓혀 왔는지 차분하게 정리해 본다. 출연 여부가 확실히 확인된 작품만을 다루며, 존재하지 않는 배역이나 과장된 설정은 의도적으로 피했다.

1. <도둑들> – 팀을 움직이는 뽀빠이, 상업영화 속 젠틀한 리더
2012년 개봉한 <도둑들>은 한국과 홍콩의 도둑들이 한 팀이 되어 어마어마한 보석을 훔치는 과정을 그린 범죄 오락 영화다. 이정재는 이 작품에서 한국 팀의 실질적인 리더 격인 도둑 ‘뽀빠이’를 연기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유 있고 능숙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계획이 틀어지면 누구보다 먼저 불안해지는 인간적인 리더다.
이정재의 뽀빠이는 화려하게 폭발하는 캐릭터라기보다, 팀 안에서 사람들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인물에 가깝다. 그러면서도 자기 이익을 놓치지 않으려는 얄미운 모습도 함께 갖고 있다. 이런 이중적인 면을 이정재는 특유의 부드러운 말투와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로 풀어냈다. 그래서 관객은 이 인물을 완전히 믿지도 못하지만, 완전히 미워하기도 어렵다.
여러 배우가 한꺼번에 등장하는 군상극 구조에서, 이정재는 과하게 튀지 않으면서도 중심을 잡는 법을 알고 있다. <도둑들>은 그가 상업 오락영화 안에서도 ‘존재감은 유지하면서, ensemble의 균형을 해치지 않는 연기’를 잘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작품이다.
2. <관상> – 수양대군, 미소 뒤에 숨은 냉혹함
2013년 영화 <관상>에서 이정재는 많은 사람들의 인식 속 이정재의 얼굴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가 맡은 인물은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 역사 속 수양대군은 이미 강한 이미지가 있는 인물이라, 배우에게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정재가 선택한 방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노골적인 악인으로만 연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영화 속 수양대군은 늘 품이 넓은 미소를 머금고 등장한다. 상대방과 대화할 때도 예의를 지키고, 목소리 톤도 크게 요동치지 않는다. 하지만 관객은 안다. 그 미소 뒤에 계산과 야망, 그리고 필요하다면 피를 부르는 선택도 서슴지 않을 냉혹함이 숨어 있다는 것을. 이정재는 얼굴 근육 하나 크게 움직이지 않고, 눈빛과 말의 속도만으로 그 이중성을 표현해낸다.
<관상>은 이정재에게 “사극·권력 캐릭터”라는 새로운 영역을 열어준 작품이기도 하다. 선이 굵고 과감한 카리스마 대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면서 이면의 잔혹함을 암시하는 연기. 그 균형이 잘 잡혀 있었기에, 관객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수양대군의 미소를 오래 기억하게 된다.
3. <암살> – 독립운동 판 속, 가장 애매한 위치에 선 염석진
최동훈 감독의 <암살>(2015)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여러 인물이 얽히는 독립운동 활극이다. 여기서 이정재는 친일파 경찰이자 독립군과 깊게 얽혀 있는 인물 염석진을 연기했다. 이 캐릭터는 일제에 협력하면서도, 동시에 과거 독립운동과도 연결돼 있는 복잡한 과거를 지닌 사람이다.
염석진은 악인이라고 말하면 분명히 악인이다. 하지만 이정재의 연기 덕분에, 관객은 이 인물을 보며 한 번쯤 “저렇게 살아야 했던 시대도 있었겠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정재는 염석진을 단순한 비겁자로만 소비하지 않는다. 살기 위해 배신하고, 배신한 뒤에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그대로 걸어가는 인물로 그려낸다.
총을 쥔 채 흔들리는 눈빛, 과거를 마주해야 하는 순간의 불안, 모든 사실이 드러난 뒤에도 끝까지 체면을 놓지 않으려는 태도. 이 모든 것들이 섞여, 염석진이라는 인물은 <암살> 속에서 가장 복잡한 감정을 남기는 캐릭터가 된다. 이정재의 연기는 관객이 악역에게조차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힘을 보여준다.
4. <신과함께> 시리즈 – 짧지만 강한 인상, 염라대왕
<신과함께 – 죄와 벌>, <신과함께 – 인과 연>에서 이정재는 지옥 재판을 총괄하는 존재인 염라대왕으로 등장한다. 출연 분량만 놓고 보면 주연급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가 등장하는 씬은 영화의 분위기를 단단하게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정재가 연기한 염라대왕은 단순한 공포의 상징이 아니다. 규칙을 지키는 판사이면서도, 인간의 사정을 모르는 냉혈한 기계도 아니다. 그는 차분한 말투와 낮은 목소리로 망자와 차사들을 상대하면서, 때로는 농담처럼 들리는 말을 던지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짧은 등장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아, 이 세계관의 최종 결정권자는 저 사람이구나”라고 느끼게 되는 이유다.
이정재는 이 배역을 통해, 러닝타임 전체를 책임지는 주연이 아니어도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증명했다. 염라대왕의 모습은 묵직한 카리스마와 유머 감각이 동시에 존재하는 캐릭터로 기억된다.
5. <오징어게임> – 성기훈으로 다시 써 내려간 커리어의 정점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은 이정재의 커리어를 세계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린 작품이다. 극 중에서 그는 빚에 쫓기고, 인생이 끝없이 꼬여 있는 인물 성기훈을 연기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책임하고 철없어 보이지만, 내면 깊은 곳에는 가족에 대한 미련, 인간으로서의 양심이 남아 있는 인물이다.
이정재가 보여준 성기훈의 얼굴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이정재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다. 정제된 수트 차림의 카리스마 대신, 트레이닝복에 늘어진 어깨,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감정선을 가진 캐릭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정재는 이 인물을 억지로 망가뜨리지 않는다. 실제 우리 주변에도 있을 법한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도 모른 채 여기까지 흘러온 사람’을 보여줄 뿐이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성기훈은 더 이상 단순한 ‘루저’로만 남아 있지 않는다. 함께 경쟁하던 사람들과의 기억, 선택의 무게,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얼굴을 바꿔간다. 이정재는 그 변화를 과장된 감정 폭발 대신, 장면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눈빛과 목소리로 표현한다. 결국 <오징어게임>은 한 인간이 어떤 과정을 통해 끝까지 버티고, 또 변해가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고, 그 중심에 성기훈을 연기한 이정재가 있다.
6. 배우 이정재가 만들어 온 결
<도둑들>의 뽀빠이, <관상>의 수양대군, <암살>의 염석진, <신과 함께>의 염라대왕, <오징어게임>의 성기훈까지. 이 이름들을 한 번에 떠올려 보면, 이정재는 분명 하나의 틀에 갇힌 배우가 아니다. 권력을 쥔 인물, 도망칠 수 없는 시대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인물, 어딘가 기울어진 삶을 살아가는 인물까지, 그는 늘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사람들을 선택해 왔다.
이정재의 연기는 화려하게 튀지 않아도 오래 남는다. 말을 아끼는 캐릭터에서는 침묵 속에서 무게감을 만들고, 감정이 앞선 인물에서는 그 불안정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이정재가 출연하는 작품에서 “이번에는 또 어떤 얼굴을 보여줄까”를 기대한다. 이미 수많은 대표작을 가진 배우지만, 여전히 다음 작품이 궁금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