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아이유로 시작했던 이지은은 이제 “연기를 정말 잘하는 배우”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듣는 사람이다. 처음 연기에 도전했을 때만 해도 아이돌의 연기 활동 정도로 가볍게 보는 시선이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배우 이지은”이라는 이름이 더 먼저 떠오르는 순간들도 많다. 그 흐름을 만들어 준 작품들이 바로 <나의 아저씨>, <호텔 델루나>, <프로듀사>, 그리고 공개 전부터 화제가 된 <폭싹 속았수다> 같은 드라마들이다. 이 네 작품을 차례로 따라가 보면, 이지은이 어떤 감정의 층위들을 거쳐 배우로 성장해 왔는지 자연스럽게 보인다.

1. <나의 아저씨> – 이지안이라는 인물로 증명한 ‘진짜 연기’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이지은의 연기 인생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작품이다. 극 중에서 그녀는 철저하게 상처 입은 청년, 이지안을 연기했다. 할머니의 병원비, 사채, 폭력, 생계… 어른이라 해도 버티기 힘든 현실을 스무 살이 갓 넘은 나이에 홀로 떠안고 있는 인물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표정 하나 잘 바꾸지 않는 무뚝뚝한 캐릭터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얼마나 많은 감정을 속으로 삼키고 있는지 보이는 사람이다.
이 작품에서 많은 사람들이 놀랐던 지점은, 이지은이 이지안을 연기할 때 ‘연기하는 느낌’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처음 등장할 때의 텅 빈 눈빛, 사무적인 목소리, 상대방을 밀어내는 듯한 태도는 단순히 차가운 캐릭터를 표현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마치 정말로 삶에 지쳐 모든 감정을 잠궈 버린 사람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극이 진행될수록 아주 작은 변화 하나에도 시청자는 크게 반응하게 된다.
예를 들어, 박동훈(이선균 분)과 함께 라면을 먹는 장면에서 잠깐 입가가 느슨해진다거나, 익숙지 않은 위로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버티려는 표정들. 대사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 사람이 조금씩 무너지고, 또 조금씩 살아나고 있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미세한 감정의 떨림을 얼굴과 눈으로 보여준 것이 <나의 아저씨> 속 이지은의 연기였고, 이 작품 이후 “아이돌 출신 연기자”라는 수식어 대신 “눈빛이 좋은 배우”라는 평가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2. <호텔 델루나> – 장만월로 완성한 판타지 여주인공
<나의 아저씨>에서의 이지안이 현실의 바닥을 버티는 인물이었다면, tvN <호텔 델루나>의 장만월은 완전히 다른 세계의 존재다. 수백 년 동안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머물러 있는 호텔 델루나의 사장, 화려한 외모와 재력, 냉소적인 태도를 모두 갖추고 있는 캐릭터. 겉으로만 보면 전형적인 ‘차가운 카리스마’ 여성 주인공 같지만, 실제로는 깊은 죄책감과 미련을 품고 세월에 갇힌 인물이다.
이 드라마에서 이지은은 한 편의 동화를 이끌어가는 얼굴이 된다. 매 회마다 변하는 의상과 스타일링, 강렬한 색감의 의상과 액세서리, 말투와 눈빛까지 모두 장만월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설계돼 있었다. 자칫하면 스타일이 캐릭터를 덮어버리기 쉬운 역할이었지만, 이지은은 화려함 속에서도 인물의 감정선을 놓치지 않았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감정이 부딪치는 장면들, 장난스럽게 웃다가도 순식간에 눈빛이 가라앉는 순간들에서 <호텔 델루나> 속 장만월은 ‘그냥 멋있는 캐릭터’가 아닌, 긴 시간을 홀로 버텨온 사람으로 느껴진다. 시청자들이 “장만월은 이지은이 아니면 상상이 안 된다”고 말할 정도로, 그녀는 캐릭터와 완전히 하나가 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작품은 판타지 로맨스에서조차 이지은이 깊은 감정 연기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예다.
3. <프로듀사> – 신디로 보여준 아이유와 또 다른 자아
KBS 드라마 <프로듀사>에서 이지은은 가요계 톱 아이돌 신디(Cindy) 역을 맡았다. 이 작품은 예능국 PD들의 일상을 그리는 드라마이면서, 동시에 아이돌·연예계의 이면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했다. 당시 이미 가수 아이유로 큰 사랑을 받고 있던 이지은이, 극 중에서 톱스타 신디를 연기한다는 사실 자체가 많은 화제를 모았다.
겉으로 드러나는 신디는 까칠하고 차가운 이미지, 인터뷰나 방송에서는 철저하게 계산된 태도를 유지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극 안에서는 소속사와의 관계,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외로움, 진심을 표현하지 못하는 성격 등이 천천히 드러난다. 이지은은 이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현실의 자신과 닿아 있을 법한 지점을 솔직하게 꺼내 놓는 듯한 느낌을 줬다.
특히, 카메라 앞에서는 웃고 있지만 대기실 문이 닫히는 순간 표정이 사라지는 장면들,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기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의 말투 등은 장르를 떠나 꽤 많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건드렸다. <프로듀사>는 이지은이 “실제 직업과 비슷한 캐릭터”를 통해 연기와 현실을 오가는 복잡한 감정을 보여준 작품으로, 자연스러운 톤과 디테일한 표정 연기가 돋보였다.
4. <폭싹 속았수다> – 기대를 모으는 새로운 얼굴, 애순
<폭싹 속았수다>는 <나의 아저씨>를 집필한 임상춘 작가와 김원석 감독이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추는 드라마로, 제작 단계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배우 이지은은 이 작품에서 주인공 애순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여성의 일생을 따라가는 서사라는 점이 알려져 있으며, 어린 시절부터 나이 들어갈 때까지의 삶과 사랑, 선택을 담아낸 작품으로 소개되었다.
2024년 기준으로 <폭싹 속았수다>는 아직 방영 전 단계였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또 한 번 인생작이 나오는 것 아니냐”는 기대를 드러내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이지은이 이전에 보여준 캐릭터들과 이 작품의 분위기가 묘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나의 아저씨>에서 삶의 무게를 버티던 이지안, <호텔 델루나>에서 긴 시간을 홀로 견디던 장만월처럼, 이번 작품의 애순 역시 시대와 환경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물로 그려질 가능성이 크다.
애순이라는 캐릭터는, 단순히 예쁘고 사랑스러운 주인공이 아니라 때로는 고집스럽고, 때로는 상처받으면서도 자기 삶을 꾸역꾸역 밀고 나가는 사람일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이미 작가와 감독의 스타일을 잘 알고 있는 시청자들, 그리고 이지은의 섬세한 감정 연기를 좋아해 온 시청자들에게 <폭싹 속았수다>는 “언젠가 꼭 만나게 될 작품”으로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5. 배우 이지은이 쌓아 온 것들
<프로듀사>의 신디, <나의 아저씨>의 이지안, <호텔 델루나>의 장만월, 그리고 <폭싹 속았수다>의 애순까지. 이 이름들을 나열해 보면, 이지은이 단순히 “아이돌 출신 연기자”라는 틀 안에 머무르는 배우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그는 밝고 귀여운 캐릭터만 연기한 것도 아니고, 극단적으로 어두운 역할만 고집한 것도 아니다. 대신, 시대와 환경이 다르더라도 결국 “사람이 견디는 방식”을 보여주는 인물을 꾸준히 선택해 왔다.
이지은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으면, 말로 다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감정들이 있다. 대사를 많이 치지 않는 장면에서도, 입술을 한 번 깨무는 순간,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순간, 호흡이 아주 조금 길어지는 타이밍에서 인물의 마음이 전해진다. 이건 단순히 잘 울고, 잘 웃는 차원의 연기가 아니라, 캐릭터의 삶을 이해하고 체화한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디테일이다.
앞으로 <폭싹 속았수다>가 어떤 작품으로 완성될지, 그리고 그 이후 이지은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미 우리는 여러 작품을 통해 “배우 이지은”이 어떤 정직한 태도로 연기를 해왔는지 지켜봐 왔고, 그 과정에서 그녀를 신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새로운 작품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우리는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된다. 이번에는 또 어떤 인물이 우리 마음속에 오래 남게 될지, 그 답은 앞으로 그녀가 보여줄 연기 안에 담겨 있을 것이다.